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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이다. 내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한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세 사건을 잇달아 기념하게 된다. 모두 우리가 정성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순서대로 하면 먼저 맞게 되는 정부 수립을 기념한 뒤에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순리(順理)를 따르지 않고 있다.

1월 30일 국무회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된 대통령령(令)을 심의·의결했다. 각계 인사 100명 이내로 구성되는 대통령 소속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실무를 담당하는 기념사업추진기획단이 설치되며 관련 부처 간 협의회도 운영된다. 1년 넘게 남은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을 범정부적으로 준비하는 것과 달리 반년 앞으로 다가온 정부 수립 70주년 기념사업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당초 정부가 제출한 2018년 예산안에는 정부 수립 70주년 관련 예산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다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부대 의견에 '예비비 30억원을 사용해 기념행사를 실시한다'는 문구를 넣었지만 아직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 수립 7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이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정(臨政)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는 '1919년 건국론'을 지지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1월 2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뒤 방명록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선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했다. 12월 16일 충칭(重慶)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자리에선 "우리는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월 2일 오전 이낙연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현충탑에 분향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방명록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 년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썼다. /연합뉴스

우리 사회의 큰 쟁점인 대한민국 건국 문제에 대통령이 개입한 것은 문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광복절을 맞은 200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경축사'를 통해 "건국 60주년 기적의 역사는 새로운 60주년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해 대대적 기념행사를 가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1948년 건국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놓고 학계와 관련 단체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대통령마저 한쪽에 서면서 국민적 화합의 장(場)이 돼야 할 국가적 기념일이 갈등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을 끝낼 수 없을까.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놓고 진행했던 공론(公論) 조사가 방법이 될 수 있다. 공론 조사로 어느 정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원전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면, 건전한 상식에 근거한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한 역사 문제에는 더욱 유용할 것이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의 엘리트들은 절대로 자기 고집을 꺾지 않지만 일반 시민들은 유연한 사고력을 갖고 있고 심의 능력도 높다"고 말한다.

중립적 입장의 신망 있는 중진 역사학자가 이끄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서 대한민국 건국 문제에 관한 중요 쟁점을 난상 토론한 뒤 그 결론에 따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중화민국이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뒤 관련된 몇몇 기념일을 놓고 국민적 토론을 거쳐서 무창 봉기가 시작된 1911년 10월 10일을 건국 기념일로 정한 것이 참고가 된다.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적 독립 의지를 모아 수립된 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일제 패망으로 독립을 되찾은 뒤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는 데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어떻게 기념할지 숙의(熟議)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건국절'이나 '대한민국 부정' 같은 극단적 주장은 걸러지고 국민적 지혜가 모아질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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