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다. 밤에는 쌩쌩한데 이른 아침엔 맥을 못 췄다. 나흘에 한 번 숙직하던 1980년대 신산(辛酸)했던 시절, 코까지 심하게 골아 같은 조원들은 그를 피하기도 했다. 아침 6시, 10분짜리 라디오 뉴스는 아나운서가 실로폰을 '딩동댕' 쳐서 지역 뉴스 시작을 알렸다. 전날 밤 퀴즈쇼에서 쓰고 풍금 위에 뒀던 실로폰을 뉴스 시작 전 스튜디오로 반드시 옮겨놓아야 했다.

어느 날 아침 6시 5분쯤 그는 테이블 위에 실로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테이블 뒤에 있는 책장 꼭대기에 있었다. 마이크에서 입을 떼지 않고 그걸 가져오기엔 3평 스튜디오가 너무 넓었다. 그는 입술에 힘을 모았다. 입으로 "딩-동-댕" 한 것이다. 웃음 터진 엔지니어에, 지역 아나운서들이 킥킥대다 뉴스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간부 용어로는 "운행에 심히 차질을 빚은 것이다." 며칠 뒤 누렇고 얄따란 봉투가 날아들었다. 심의실에서 보낸 그 봉투 맨 위에 '경고'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유머와 재기가 풍부하고 술과 담배를 즐겼다. 춥디추운 날에도 포장마차 가면 소주 두 병에 안주는 꼭 간과 처녑을 시켰다. 사내들은 그런 걸 먹어야 한다면서. 하루 두 갑씩 담배도 피워댔다. 한번은 좀 걱정돼서 그랬다. "담배 너무 태우시는 거 아녜요? 소리 안 나오면 어떡하시려고. 중계도 많으신데." 그의 대답을 기억한다. "인마, 담배 몇 대 빨았다고 모가지 캑캑거리면 그게 아나운서야? 그냥 국민이지. 쪼다 같은 놈." 

연전에 그는 고인이 됐다. 파주 어느 야트막한 동산, 하관(下棺)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환청이 들렸다. 칠성판 위에 누워 있던 그가 말했다. "야! 관 뚜껑 열어, 답답해." 웃음이 나올까 봐 담배 하나 꼬나물었다. "성동원두(城東原頭)는 흥분의 도가니, 열광의 도가니!" 그는 야구 중계의 달인이었다. 추억의 서울운동장 야구장, 지금 그 멋진 동대문 DDP 어느 어름에 그의 목소리가 숨 쉬고 있을 것만 같다.


※2월 '일사일언'은 강성곤씨를 비롯해 조동희 가수 겸 작사가, 박원순 에버랜드 가드너, 김풍기 강원대 교수, 권용득 만화가가 집필합니다.
-조선일보-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