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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넘게 여자들에게 꼬리표처럼 수식된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난 앞에서 약한 자는 여자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란 것.

서던 덴마크대학의 역학(疫學) 전공 교수인 버지니아 자룰리 박사는 지난 8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근(飢饉)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여자가 남자보다 생존력이 더 강했다"고 밝혔다.

세계 어느 곳이든 평균수명은 여자가 남자보다 길다. 우리나라도 갓 태어난 여자 아기의 기대수명은 85.4세, 남자는 79.3세다. 그렇다면 극한 상황에서도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까. 평상시면 몰라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치면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한 여자가 더 힘들지 않을까. 자룰리 교수는 지난 2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기대수명이 20세 이하로 곤두박질친 7번의 사건을 조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1933년 세계적인 밀 생산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당시 소비에트 정권의 무리한 집단농장화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4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연구진은 당시 남자의 기대수명이 41.58세에서 7.3세로 줄었으나, 여자는 45.93세에서 10.9세가 돼 여자의 수명이 더 길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845~52년 감자 농사가 곰팡이병으로 초토화돼 대기근을 겪은 아일랜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인구 800만명 중 100만명이 죽고 200만명은 영국·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때도 여자가 강했다. 대기근 전 기대수명은 남녀 모두 38세였는데, 기근 후 남자는 18.17세, 여자는 22.4세로 떨어졌다.


 

일러스트=이철원

심지어 기대수명이 한 자리로 떨어진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1820년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은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돌아왔지만 한 해 만에 43%가 풍토병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래도 당시 여자 아기의 기대수명은 2.23세로 남자 아기의 1.68세보다는 길었다. 18세기 스웨덴의 기근도, 19세기 아이슬란드의 홍역 창궐 때도 6개월에서 4년까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오래 살았다. 1813년 카리브해 트리니다드의 노예 사회에서는 젊은 남자의 기대수명이 여자보다 길었지만, 이는 남자 노예의 가치가 여자보다 높았기 때문에 발생한 예외적 사례로 설명됐다.

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까.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힘든 육체노동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육체노동이 크게 줄어든 서구에서는 19세기나 지금이나 모두 여자가 남자보다 수명이 평균 5% 길다. 일부에서는 남자가 흡연이나 음주, 마약 복용처럼 수명을 줄이는 위험한 행동을 더 많이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인간과 같은 영장류인 침팬지, 오랑우탄은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지만 암컷이 수컷보다 오래 산다는 점에서 근거가 희박하다.

대신 이번 연구진은 기근이나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남녀 수명 차이가 대부분 유아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후천적 직업이나 행동 차이보다는 타고난 생물학적 차이가 수명 차이를 불렀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성(性)호르몬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은 인체의 면역 기능을 강화해 감염병을 예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포에 손상을 주는 산화작용도 막는 효과가 있다. 동물실험에서 에스트로겐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는 암컷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반대로 남성호르몬은 남성의 수명을 줄인다. 가축에서 거세된 수컷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그 방증이다. 2012년 국내 연구진은 사람에서도 같은 효과를 확인했다. 조선시대 환관(宦官·내시)과 양반의 족보를 비교한 결과, 양반의 평균수명은 51~56세였지만 환관은 평균 70세까지 살았다.

성염색체도 여자는 X염색체 두 개가 있지만, 남자는 X염색체 하나와 Y염색체 하나씩만 갖고 있다. 여자는 유전자의 복사본을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지만, 남자는 한쪽에 문제가 생기면 대체할 유전자가 없어 질병에 더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성호르몬이나 성염색체는 모두 여자가 자손을 낳을 어머니의 몸이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말한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가 과학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앞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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